[실록 민주화 운동](13) 자유언론 수호 운동 (2024)

[실록 민주화 운동]자유언론 수호 운동

경향신문 입력 : 2003-07-13 18:54:10

“오늘의 언론 위기가 한계상황에 이르렀음을 통감하고 꺼져가는 언론자유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불퇴전의 자세로 일어설 것이다”. 1971년 4월15일 동아일보 기자 30여명이 회사 별관(지금의 광화문 구사옥 옆)에 모여 낭독한 결의문의 일부이다. 기자들은 3개 항목의 결의사항을 채택했다. “▲사실을 진실대로 자유롭게 보도한다 ▲외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한다 ▲기관원의 사내 출입을 거부한다”

선언문을 낭독하는 젊은 기자들의 긴장된 얼굴에는 비장감이 감돌았다. 선언에 참가했던 정동익은 당시 심경을 이렇게 말한다. “실직과 물리적 폭력을 각오하고 선언에 참가했다. 쉽지 않은 결단이었으나 역사가 젊은 기자들의 결단을 요구했다”. 4·15선언을 주도했던 고 심재택은 이후 실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고, 대량 해고사태 때 다시 해직되는 어려움을 거듭하게 된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선언에 이어 한국·조선·대한일보 등 전국 14개 신문·방송·통신 기자들도 잇달아 자유언론수호를 선언하고 나섰다. 한국기자협회는 5월15일 신문회관(지금의 언론재단 건물)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론인 스스로의 피나는 투쟁에 의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진리로 알고 있다”며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훗날에 와서 제1차 언론자유수호 선언이라고 명해지게 된다.

박정희 정권 이후 196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자유언론은 고사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박정권은 군정을 종식하고 민정 이양을 하겠다던 약속을 깨고 정권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증권파동 등을 비롯한 각종 부정부패로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부정선거로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대내외적 비판에 직면했다. 언론은 선두에 서서 군부정권의 부정행위를 비판했다. 3선개헌, 나아가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 추진을 위해 군부는 언론을 장악해야 했다.

64년의 언론 파동도 이러한 갈등의 한 결과였다. 64년 한·일회담에 대한 언론의 비판과 반대에 직면했던 박정권은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제정해 언론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언론계는 저항했고 권력의 탄압이 뒤따르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64년 언론 파동이었다.

64년 언론 파동 이후 언론계는 권력 앞에 무너지고 있었다. 박정권은 3선개헌 등을 추진하면서 언론 파동때 권력에 저항했던 주요 신문사들을 차례로 굴복시켜 나갔다. 경향신문은 강제경매 처분 형식으로 사주의 손에서 빼앗아 어용화했고 조선일보는 현금 차관이라는 특혜로 포섭했다. 동아일보는 소위 신동아 사건 관계기사를 꼬투리잡아 기업주를 굴복시켰다. 기관원들이 언론사를 수시로 자유자재로 출입하면서 직접 보도를 통제하는가 하면, 언론인에 대한 폭행·테러·협박 등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신문은 제 기능을 상실했고 독재권력에 대한 각계 각층의 저항은 보도되지 못했다.

71년에 들어서면서 언론에 대한 대학가의 항의는 거세졌다. 71년 3월26일 서울대 학생 50여명은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통해 “민중의 소리를 외면한 죄는 무엇으로 갚을텐가”라고 외치며 언론 화형식을 가졌다. 신문사 창문 밖으로 학생들의 언론 화형식을 내려다 보는 젊은 기자들의 심경은 참담했다. 4월2일 연대생 500여명도 전국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언론인들이 약삭 빠른 상황 판단으로 은 몇냥에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의 후손으로 탈바꿈한다면 냉엄한 심판의 날 책임을 회피하는 어떠한 변명도 가소로운 궤변으로 조소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권력의 폭압과 학생들의 질타 사이에서 기자들은 자괴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자탄과 폭음으로 울분을 토로하다 마침내 언론자유를 위한 실천에 나서기로 결의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제1차 언론자유수호 선언으로 표출되었다. 젊은 기자들의 이같은 궐기로 71년 4월27일 대통령 선거때 신문들은 어느 정도 제 구실을 할 수 있었고 이는 야당 후보의 ‘선전’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언론자유수호의 열기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대선이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끝나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언론사에 상주하다시피 했고 기자들에 대한 불법 연행이 이어졌으나 어느 언론사도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이미 경영진은 권력에 완전히 굴복한 뒤였다. 젊은 기자들의 자유언론에 대한 열망은 종신 독재체제로 들어가는 비상시국과 10월 유신 앞에서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71년 대통령 선거 후 이어진 5월25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은 개헌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해 10월 박정권은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내리고 12월에는 안보를 핑계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사설을 통해 국가비상사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동아일보 전 주필 천관우 등이 사임을 강요당하고 논설위원 송건호는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

72년 박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등 이른바 유신체제를 감행했다. 기사를 검열하고 행정기관내 기자실을 폐쇄해 기자들을 내쫓았다. 당시 동아일보에 근무하면서 대학교를 출입하던 한 기자는 “기자 신분을 숨기고 주민등록증을 맡긴 채 졸업생이 교수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학교에 들어가야만 될 상황이었다”고 술회했다. 유신선포 후 약 1년간 언론은 정권의 폭압 앞에 숨죽이고 있었다.

학생·시민들의 분노는 유신에 대한 저항과 함께 언론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73년 유신헌법을 반대하여 일어난 학생들은 언론자유 보장을 외쳤고 국회에서도 야당 의원들에 의해 여러번 언론자유 보장문제가 거론되었다.

언론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빗발치자 언론활동에 극도의 제약을 받아오던 기자들은 다시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73년 10월19일 경향신문 기자들이 ‘외부 압력 배제, 사실보도 충실, 인사 쇄신, 급료 인상’ 등을 주장하는 선언문을 채택한 이후 동아일보 기자들이 제2차 언론자유수호 선언을 채택했다. 10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대부분의 신문·방송들이 언론자유수호 선언에 동참했다. 73년의 언론자유수호를 위한 투쟁을 제2차 언론자유수호 선언이라 부른다.

2차 언론자유 수호운동에 대해 당시 문공부는 “언론기관에 정보기관원 출입을 금지시키고 제작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약속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 중대한 안보사항 등에 대한 보도는 자제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74년 1월8일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는 문공부가 약속한 최소한의 조치마저 무의미한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만다. 박정권은 긴급조치를 통해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관련 보도조차 금지했다.

74년에 접어들어 언론인 연행이 빈번해졌다. 합동통신 기자가 병무행정에 관한 내용을 기사화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고 중앙일보 기자는 5월3일 박영복에 관한 부정 대출사건을 보도했다가 구속되었다. 박영복사건 보도와 관련해 다수의 기자들이 연행되어 조사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풍자하는 시사만화를 게재한 만화가도 연행되었다. 9월 초에는 특권 상류층 여성들의 보석 밀매사건이 터졌다. 유신정권은 국가안보를 내세워 이 사건을 기사화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했다.

10월22일 월남문제 해결 기사와 관련해 한국일보 사장과 편집국장이 연행되어 조사받았고 같은 달 23일에는 학생 시위 관련보도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이 연행되었다. 당시 연행 상황을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3일 수원에 있던 서울 농대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시내로 진출했다는 수원 주재 기자가 보내온 기사가 있었다. 기관원이 와서 그 기사를 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압력을 거부하고 그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 크게 다룬 기사도 아니었다. 나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벌써 몇번째 연행인가. 언제 끌려가도 그 기분 나쁜 연행. 한번 가면 15시간은 조사받았다”

이러한 연행사태에 대해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은 연행된 간부들이 돌아올 때까지 귀가하지 않고 편집국에서 대기하며 저항하기로 결의했다. 마침내 10월24일 오전 9시19분 동아일보에서는 신문·방송 기자 200여명이 모여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채택했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가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하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주는 것은 아니다”

기자들이 선언에서 언론자유의 ‘수호’가 아니라 ‘실천’이라고 한 것은 이제까지 수차례에 걸쳐 선언을 했으나 그때마다 선언에 그치고 실천하지 않은 것에 깊이 반성하고 선언에서 반드시 실천으로 발전시킬 것을 다짐하는 의미였다. 그러나 신문사 측에서는 이 선언문의 기사화를 거부했다. 기자들은 기사를 게재하기 위해 제작 거부로 맞서 결국 신문에 게재토록 하는데 성공했고 동아일보의 이러한 움직임은 삽시간에 전 언론계에 퍼져 30여개의 신문·방송이 ‘실천 선언’에 나섰다.

70년대 초 언론자유수호 선언은 반독재운동이었다. 당시 언론운동은 군부독재의 언론 탄압에 맞서 사회를 민주화하는 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함세웅신부가 본 당시 언론

“데모하다 맞아 죽어가는 학생들에 관한 기사는 전혀 나오지 않거나 고작 1단으로 실리면서, 학 한마리가 다리를 다쳤다는 기사는 1면에 대문짝 만한 사진과 함께 실리곤 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함세웅 신부는 1970년대 독자가 바라본 한국 언론의 상황을 이런 말로 압축했다. 73년 6월 로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함세웅은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언론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다. 2,000~3,000명이 모여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를 올리고 거리 행진을 해봤자 언론은 이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집회 사실만 간단하게 보도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왜곡 보도도 많았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영장없는 불법 연행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한 신문은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법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냐”고 비꼬았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후 몇몇 신문에 함세웅을 비롯한 사제 80여명이 육여사를 추모하는 미사를 올린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러나 함세웅은 미사를 부탁하는 요청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며 거절했으므로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언론자유를 갈망하는 젊은 기자들과의 가슴뭉클한 추억도 있다. 사제단은 74년 인혁당 고문 조작설을 제기한 조지 오글 목사를 정부가 추방하자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처음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함세웅에게 가톨릭 신문사 관계자는 회견에 오는 기자들에게 촌지를 주는 것이 관행이라고 일러줬다. 이 말을 듣고 택시비 조로 3,000원씩 봉투에 넣어 기자들에게 줬다. 그런데 1시간쯤 뒤 기자단 대표가 돈봉투를 모아와서는 “신부님들의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라면서 돌려주고 가더라고 했다.

[출처] [실록 민주화 운동](13) 자유언론 수호 운동|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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